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문단 편집) == 부부 대통령 == 2001년 [[급진시민연합]] 정부가 경제난의 혼란속에 물러나고 페론당이 재집권하게 되었으나, 여러번 대통령이 교체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주요 도시 지역에서 예금동결과 페소화 가치의 폭락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는 등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는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2002년에 정의당의 두알데가 잔여임기를 행사하는 조건으로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여전히 혼란은 가속화 되었고, 급기야 200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의당은 노선 대립으로 분열되었다. 이때 키르치네르 분파는 '승리를 위한 전선'으로 나왔다. 사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처음 대선에 나온다고 했을땐 상황을 좋게 보지 않은 크리스티나도 네스토르가 대선에 나오는 것을 만류했지만 결국 네스토르는 대선에 출마하게 되었고, 키르치네르 부부는 함께 승리를 위한 전선을 이끌며 활발한 선거운동을 했다. 1차 투표에서는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이 1위,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2위를 했으나, 2차 투표를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역사적인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여론조사가 속속 발표되자 메넴[* 대통령 재임 당시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서 빈부격차가 급속히 커지고 실업률이 증가한데다가 무엇보다도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당시에도 저환율 정책(1달러=1페소 이는 당장의 물가안정에 큰 도움을 주었지만 그 뒤에 아르헨티나 상품의 대외적인 가격이 크게 높아지면서 수출이 줄어들어버리는 바람에 부메랑이 되어버렸다.)을 펴서 19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라 이미지가 영 좋지 않았던게 컸다.] 전 대통령이 사퇴하면서 남편이 당선된다. 이때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남편 당선의 1등 공신으로 호평받았고, 남편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계속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남편의 정책 집행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뛰어난 언변과 능숙한 대인관계도 덤. 이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를 극복하며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2007년 재선에는 도전하지 않기로 했으며, 대신 아내인 크리스티나가 출마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선 당시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키르치네르 부부의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관계로 출마를 강행했다. 결국 그녀가 대선에서 당선되면서, 이 부부는 '''세계 최초로 부부가 연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또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이사벨 페론]][* [[후안 페론]]의 세 번째 부인으로, 1973년 선거를 통해 부통령이 되었고, 1974년 남편이 취임 몇달만에 사망한 이후에 세계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다만 정치면에선 막장이어서 실정을 거듭하다 결국 쿠데타로 쫓겨났다. 여담으로, 이사벨은 아르헨티나가 민주화되고 난 이후에도 그닥 좋은 소리는 못 든는 모양. 오히려 재임 시절 있었던 인권운동가 실종 사건으로 2007년에 스페인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그나마 그녀에게는 다행히도 아르헨티나로 송환되지는 않고 가택 연금으로 그친 듯.] 이후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대통령과 영부인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